2013년 03월 01일
[삼일절 기념 ㅎ] <정의란 무엇인가>
9강.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 충직 딜레마-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ml:namespace prefix = o />
오늘 삼일절을 기념하야ㅋ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개사죄와 보상, 역사적 부당행위에 대한 집단적 책임, 애국심 등을 논하고 있는 9강 중 내 관심을 끈 부분들에 대해 좀 끌쩍거려 보려 한다. ㅎ
얼마 전까지 한동안 제2차 세계대전사에 푹 빠져 있었는데, 참 이 당시 독일놈들과 일본놈들을 안 미워할래야 안 미워할 수 없더라는 거지.
특히, 일본놈들은 전후에 사죄나 배상도 발뺌하는 주제에, 원폭 피해 등을 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모습이 아주 역겹단 말이지. (원폭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그런데 이런 마음이 드는 내 자신에게도 질문을 하게 된다.
왜 이렇게 일본이 미울까? 지금은 일본 여행도 가고, 일본 영화도 보고, 일본 사람들 보면 너무 예의 바르고 좋은 데 말이다. 나도 이 책이 던지는 것과 같은 질문을 마음 속으로 많이 해왔다.
조상의 죄를 우리가 속죄해야 하는가?
2008년에 뉴저지 주 입법부가 사죄 문제로 논쟁을 벌일 때, 공화당 하원의원 한 사람이 물었다. “오늘날의 살아 있는 사람 중에, 노예를 소유한 죄가 있어서 그 범법 행위를 사죄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가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늘날의 뉴저지 주민은, 조상 중에 (……) 노예를 소유한 사람이 있을 지라도, 개인적으로 자신과 무관한 잘못에 집단적 죄의식이나 책임감을 느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원이 노예제와 인종분리 정책에 대한 사죄 문제를 표결에 부치려고 준비하는 동안, 어느 공화당 의원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한 행동을 사죄하려 한다며 비난했다.
(*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그럼 재산 상속도 받지 마라.”)
도덕적 개인주의
도덕적 개인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자유의 진정한 의미이다. 도덕적 개인주의자들에게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을 떠맡는 것이다.
(* 하지만 서로서로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엉키고 설킨 이 사회에서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가 어떤 것인지, 얼마나 되는지, 대체 무슨 수로 구별하고 계량한단 말인가?
자신의 자유가 침해 받는 것에 무지막지 민감해하며 이런 논리를 내는 사람들 중에는 남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경우도 많더라.)
공동체의 요구
(……)
롤스의 <정의론>이 미국의 자유주의에 풍부한 철학적 발상을 제공한 지 10년이 지난 1980년대에, (나를 포함해) 수많은 비판자들이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방금 설명한 부담을 감수하려는 자아라는 이상을 수정했다. 이들은 권리를 선에 앞세우라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목적과 애착에서 관심을 끊고 정의를 이성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현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자’로 불렸다.
이들은 대개 공동체주의자라는 용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특정 공동체가 규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정의가 될 수 있다는 상대론적 견해를 암시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중요한 문제 하나를 던진다. 공동체가 주는 부담은 억압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카스트나 계급, 신분이나 서열, 관습이나 전통, 타고난 지위로 정해지는 운명을 인정하려는 정치론에 대한 해독제로 발전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만약 인간은 자발적 존재라는 개념이 희박하다면, 만약 의무가 전부 우리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를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자아로 볼 수 있겠는가?
(* 이 책을 읽으면서 – 또한 그 전부터 매우 자주 – 나는 ‘empathy 공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서양 속담에도 있듯 이, ‘너의 발을 다른 사람의 신발에 넣어보’고,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는’ 것 말이다.
물론 ‘empathy’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야기하는 존재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이 문제에 대단히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한다.
(* 이제 내가 이 포스팅을 하는 이유가 되는 부분이 나온다. ㅎ)
그는 <덕의 상실>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도덕적 행위자로서 목적과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매킨타이어는 인간을 자발적 존재로 보는 시각의 대안으로 서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우리는 서사적 탐색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매킨타이어가 관찰하기에, 모든 체험된 서사에는 특정한 목적론이 깃들어 있다. 이는 외적 권위가 부여한 고정된 목적이나 목표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목적과 예측 불능은 공존한다. “허구의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우리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삶에는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특정한 형식이 있다.”
삶이란 특정한 통합이나 일관성을 갈망하는 서사적 탐색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갈림길에 마주쳤을 때, 우리는 완전한 삶, 내가 관심을 갖는 삶으로 이끄는 길을 찾아내려 애쓴다.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에 가깝다. 여기에는 선택이 끼어들지만, 그것은 해석에서 나오는 선택일 뿐, 의지에서 나오는 절대적 행위가 아니다. 내 앞에 놓인 어느 길이 내 삶의 궤적과 가장 잘 어울리는 지는 나보다 남이 더 분명히 알 수도 있다. 도덕적 행위자를 서사로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러한 가능성을 허용하는 미덕이 있다.
이 설명은 내 삶이 속한 더 큰 삶에서는 도덕적 고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쓴다. “나는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 내가 속한 이야기와 타협할 때만이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
(……)
매킨타이어는 젊은 독일인의 예를 제시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1945년 이후에 태어났으니, 나치가 유대인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든 현재 자신과는 도덕적으로 연관성이 없다.”고 믿는다. 매킨타이어는 이 예에서 도덕적 천박함을 발견한다. “나는 사회적, 역사적 역할과 지위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자아를 서사적으로 보는 관점과 명확히 대조되는 입장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는데,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다.”
애국심이 미덕인가?
(……) 국가가 외부인의 합류를 막는 행위는 어떤 근거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 부유한 국가의 경우, 이민 제한 정책은 시민의 특혜를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
이민 제한에 찬성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는 미국 비숙련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임금 수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저임금으로도 얼마든지 일할 이민자들이 몰려오면 미국 노동자들이 당장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이 논리를 듣다 보면 우리가 해결하려는 질문으로 되돌아 간다. 왜 가장 힘 없는 우리 노동자부터 지켜야 하는가? 더 가난한 멕시코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지 않더라도 그리해야 하는가?
제일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견해로 보면, 개방적인 이민 정책을 실시해야 옳을 듯하다. 그러나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조차도 이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에는 도덕적 근거가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삶과 역사를 공유하는 시민의 행복을 추구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 그러하다. (……) 왈저는 이렇게 쓴다. “애국의 정서가 도덕에 기초할 때만이, 공동체의 결집이 의무와 공동의 의미에 이바지할 때만이, 이방인뿐만 아니라 자국 구성원이 있을 때만이, 국가 공무원은 자국민의 행복에, (……) 그리고 자국의 문화와 정치 번영에 각별히 신경을 쓸 이유가 생긴다.”
(* 이 부분은 정말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다만 이 논리가 해외 결식 아동을 돕거나 동물 보호, 환경 보호 운동을 하는 일에 대해 “우리나라에도 못사는 사람 많은 데 쓸데 없는 짓 한다”는 말을 뒷받침하는 데에 쓰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나의 문제를 다 해결해놓고 남을 돕겠다고? 그건 영원히 돕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소리다.)
(* 충직 딜레마는 평생 나를 괴롭혀온 질문이기도 하다. 특히 이기주의과 이타주의, 차별 등등의 개념들과 함께.
가족 구성원에게는 매우 이타적인 어머니가 가족이기주의에 빠지게 되는 문제라든지, 소외되고 억압 받는 이들을 위해 투쟁하는 동안 가족들은 외로움과 경제적 곤란에 허덕이게 된다든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자;), 우리 나라의 국익만을 위해 열심히 달렸더니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고 있더라든지…
이 책에 나오는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군 사령관을 맡았던 로버트 리 장군의 고뇌가 매우~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연대는 우리 사람만 챙기는 편애인가?
(……) 그러나 우리 사람에게만 특별히 관심을 두는 이런 태도는 편협하고 내부지향적이어서, 애국심이나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가치를 인정하기보다는 극복해야 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연대와 소속 의무는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로도 향한다.
(……)
스웨덴 사람도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면서 그 전쟁을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직 미국 사람만이 그 전쟁을 부끄러워할 수 있다.
자부심과 수치심은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도덕 감정이다. 미국인이 외국을 여행하다가 볼썽사납게 행동하는 미국인과 마주쳤을 때, 개인적으로는 그를 모를지언정 당혹스러울 수 있다. 다른 나라 사람이 그 행동을 보았다면 역시 눈살을 찌푸렸겠지만 당혹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ㅎ 이제 좀 마음 편히 싸이가 우리 나라 사람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좀 가져도 되겠군 ㅋ
갑자기 박노자가 책의 이 부분을 읽는다면 뭐라고 할 지 궁금해진다.)
(……) 소속감에는 책임감도 따라온다. 내 나라의 과거를 현재로 끄집어내 도덕적 부채를 해결할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 나라와 역사에 진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정의와 좋은 삶
(……) 우리 의무는 모두 의지나 선택에서 나왔을까? 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연대 의무나 소속 의무는 선택과는 관련 없는 이유, 즉 우리 삶과 공동체를 해석하는 서사와 관련된 이유에서 나올 수 있다.
(……)
정의나 권리를 공개 석상에서 토론할 때 좋은 삶에 대해서도 토론하자고 한다면, 내켜하지 않거나 심지어 기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국처럼 다원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최선의 삶에 관해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이게 마련이다. 자유주의 정치론은 정치와 법이 도덕적, 종교적 논란에 휩쓸리는 일을 막기 위해 탄생했다. 칸트와 롤스의 철학은 그러한 야심을 아낌없이, 그리고 더없이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 야심은 성공할 수 없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뜨거운 쟁점 중 상당수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논란이 되는 문제를 피해가지 못한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할 때, 좋은 삶에 관한 여러 견해를 항상 배제할 수 없다. 가능하다 해도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민주시민에게 공적 영역에 들어갈 때는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내려놓으라고 주문한다면, 관용과 상호 존중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반대다. 가능하지도 않은 중립을 가장한 채 중요한 공적 문제를 결정하는 행위는 반발과 분노를 일으키는 지름길이다. 중요한 도덕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정치는 시민의 삶을 메마르게 한다. 그런 정치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도덕주의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건드리기 두려워하는 곳에는 근본주의자들이 몰려든다.
정의를 토론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본질적인 도덕 문제에 빠진다면, 그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 지 생각해봐야 한다. 공개적으로 선을 논하면서 종교를 두고 한바탕 싸움을 벌이지 않을 수 있을까? 공개 토론에서 도덕 문제를 더 깊이 다룬다면 그 토론은 어떤 모양새가 되고, 우리가 익히 보아온 정치 토론과는 어떻게 다를까? 이는 단지 철학적 질문에 머물지 않는다. 정치 토론과는 어떻게 다를까? 이는 단지 철학적 질문에 머물지 않는다. 정치 담론에 생기를 불어넣고 시민의 삶을 새롭게 하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핵심 질문이다.
(* 싸우면서 크는 거다^^;)
포스팅을 올리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다카키 마사오의 딸은 삼일절 행사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 by | 2013/03/01 17:02 | 책 book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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